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 개혁사상 이 펼처 진다
출생 1762년 (임오년 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나주정씨 재원과 어머니 숙인 해남윤씨의 넥째 아들로 탄생
22세때 (1783년) 진사 시험 합격 , 28세때 (1789년) 문과 급제 벼슬 시작
배다리 설계 ; 정조 임금이 사도세자 묘소를 수원으로 참배 가기 위해 배를 둘씩 묶어 다리 설계
거중기 설계 ; 화성을 쌓는데 거중기를 설게 하여서 공사비 4만냥 절약 ,, 공기 단축으로 업적 남김
강진 유배 : 1801 ~ 1818 년 노인 남인 싸움에 천주교로 몰려 유배 하면서 다산초당 후배및 학문 완성